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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에 감기는 낯선 느낌은 차가움이었다. 낡아 빠진 비도 대신 닿은 차가운 기운에 몸을 일으켜 창문너머를 바라보았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묘시(5~7시). 여명이 들락말락한 완벽한 새벽의 시간. 당보는 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선 춤을 추듯 무언가 내리고 있었다. 희게 내리는 무수한 덩어리들. 사천에선 보기 드문 눈이었다. 몇 십 년을 사천에서 살았지만, 눈 내리는 걸 직접 본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나이가 들면 괜히 감상적이게 된다더니, 당보는 속으로 스스로를 비웃으며 기꺼이 그 세계를 마주했다. 남빛의 고요한 세계에 정적으로 눈이 쏟아진다. 그 기이한 역동을 한참 바라보며 당보는 습관적으로 협탁 위 연초대를 들었다. 매캐한 향이 퍼지고 당보는 그제야 시선을 연초로 옮겼다. 창문을 등진 채, 그는 한 모금 연기를 머금었다. 그가 자주 피는 연초는 자신이 직접 배합해서 만들어 약간의 독이 섞여있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마실 때마다 손끝이 검게 변했지만 곧 붉어졌다가 희게 변했다. 몇 모금 입에 향을 머금더니 그는 금방 곰방대를 내려놓았다. 여전히 그의 등 뒤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힐끗 창문을 돌아본 그가 탁상에 앉았다. 충동적으로 붓과 종이를 들더니 한자, 한자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쓸 때마다 그는 눈을 보았다. 그리고 숨을 들이켰다. 들이마신 숨은 서늘함 반, 따가움 반, 그리움 반이었다. 내뱉는 숨은 가느다랗기 짝이 없었다.
청명을 보지 않은 지 몇 년의 해가 지나갔다.
천마를 치면 다 끝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다른 시작이기도 했다. 머저리같은 제 집안은 드디어 독의 한계를 깨달았고 자신에게 가르침을 구했으며 집안 어른 대접을 해주더랜다. 그간 앙금은 어디로 갔는지. 그렇게 검존 뒤만 쫓아다닐거냐며 채근거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집안의 가장 높은 어르신이라며 원주자리를 강제로 주었다. 그뿐이랴. 직접 비도술을 정비하고, 초식을 정리하고, 할 일이 태산이었다. 안 뿐만 아니었다. 밖에서는 소림과 화산이 한바탕하고 있었다. 분열된 정파들. 아예 대놓고 화산 쪽으로 가려는 움직임과 이를 제지하려는 소림. 천마만 때려죽이면 평생 놀고 먹으리라 했는데 이걸 또 두고 볼 수 없어 불철주야로 사방군데 뛰어다녔다.
당보는 쓰다 만 글자를 내려 보았다. 정갈하게 쓰인 서신은 한쪽으로 살짝 치우쳐 있으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보내지 못할 것이다. 아니, 아니할 것이다. 일기나 다름없는 서신. 정리하지 않은 감정정도는 써내려도 되지 않을까. 충동적으로 적은 그의 이름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내뱉는다.
청명은 천마를 벤 영광을 얻었으나, 같이 화도 얻었다. 선천지기를 끌어다 쓴 탓에 단전은 엉망이었고, 팔 한쪽은 날라 갔으며, 마기에 그대로 노출 된 탓에, 이립의 청년의 모습에서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변했다. 희게 변한 머리에 놀란 당보를 보아도 청명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제 나이로 보지 않겠냐며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옆으로 묶어 넘겼다. 한쪽 팔을 잃고 난 후의 습관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 떠오르자 당보는 그만 붓을 놓쳤다. 살이 내려 마른 모습에 왼쪽 아래로 비스듬히 묶은 머리. 가늘어진 턱선과 핏기 없는 뺨. 언제든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모습. 언제든 볼 수 있으면서 보지 못하는 건 나약한 자신 때문이다. 당보는 시리게 박힌 그 모습에 이제는 가린 한쪽 눈 위로 손을 올렸다. 이 눈이 마지막으로 본 건 청명의 뒷모습이었다. 피에 젖은 채로 움직이며 단 한번도 돌아보지 않던 모습. 거룩한 신뢰.
떨어진 붓은 종이 위를 구르고, 설원 위에 펼쳐진 발자국처럼 나부꼈다. 검은 액은 눈 위의 초상처럼 그려지고, 흰 종이는 그렇게 번져나갔다.
몇 달을 청명을 치료하려고 애썼는지 모른다. 집안일을 한숨 돌리고 나면 화산으로 올랐다. 화산은 고요했고, 청명의 숨소리도 사뭇 조용했다. 몇 번이고 그 모습을 보는 당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았을 때. 하다못해 내력이라도 밀어 넣어 마기를 정화해줄 수 도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제야 자신의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실감했다. 하늘같던 세상이 달라졌음을 자신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쯤, 청명은 당보에게 이제는 너를 볼 때라며 화산에 오른 당보를 기어코 돌려보냈다.
당보는 붓을 다시 들었다. 이미 검게 변한 종이엔 무엇이 쓰여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보내지 않는 편지를 쓰는 자신도, 보내지 않는 편지를 받는 청명도. 물든 종이조차도. 물든 곳에 당보는 붓을 놀렸다. 밖의 눈은 제법 더 흩날렸고, 소복하게 쌓여만 갔다. 쌓인 곳에 이른 아침을 여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찍혔다. 멀리서 보면 밟힌 눈 자국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억으로 찍히는 것이리라.
청명의 마지막 얼굴을 그리며 검게 물든 종이 위에 당보는 거침없이 써내려갔다. 당신이 내 세계를 깼을 때. 그리고 그 세계가 깨졌을 때. 당보가 써내려간 글은 번져서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보이는 건 명(明)이라는 글자였다. 검은 배경을 지나 당보는 흰 바탕에 글을 이어쓰기 시작했다. 이제는 마주해야할 것들. 내 세계가 바뀌었음을 인정하고 다시 그를 보는 날이 이어져야하는 것들. 오랜 시간 외면한 감정들.
하얗던 종이에 새까맣게 채워진 글귀들. 당보는 기어코 써내려가며 해묵은 감정을 꺼내들었다. 청명과 보내던 시간. 정마대전이전의 나날들. 그렇게 빛났지만, 그렇기에 바랠 수밖에 없는 날들. 정마대전의 고통들. 당신을 치료하면서 느꼈던 모멸감. 자신이 그토록 아끼는 이를 바쳐 이뤄낸 평화. 말 그대로, 글자그대로 몸을 바치고, 마음을 바치고, 모든 걸 바친 평화. 겨우 얻어냈지만 마주 하고 싶지 않은 진실. 이 모든 것을 누릴 당신은 없다는 것. 그럼에도 당신은 나를 위해, 돌려보냈다. 끝을 아는 당보에게, 베풀어준 온전한 자비였다.
끝이 오리라는 걸 알았다. 이번 겨울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설중군자는 차갑게 질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몇 년 동안 청명은 자신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당보는 다 쓰지 못한 편지를 봉했다. 그걸 품은 채 밖으로 나섰다. 나선 발걸음은 사뭇 가벼웠다. 눈길에는 종적하나 남지 않았다.
그 전처럼 산문으로 나가지 않고 청명의 처소로 바로 담을 넘었다. 희미하게 아해들의 훈련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당보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다는 것처럼 앞마당에서 청명은 당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보를 보자 청명은 웃었다. 당보 역시 청명을 보고 웃었다. 주름진 눈가에 맺힌 웃음이 온전했다. 봉한 편지는 전하지 않았다. 당보는 그 웃음으로도 족했다.
청명은 그 겨울을 넘기지 못했다. 당보는 청명의 마지막 숨에 편지를 꺼내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가지런히 들린 편지는 청명의 손에서 빠지지 않았다.
당보는 그 다음해를 넘기지 못했다. 당보의 손엔 설중군자의 꽃잎이 떨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