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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났다. 단 한 마디로 끝날 말이었지만, 끝나기까지 과정은 말이라도 되새기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했다. 세상에 누가 천하제일인이라 불릴 수 있는지 목소리를 높이는 논쟁에 관심은 없었지만, 자신의 실력이 절대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마는 자신이 안중에도 없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강했다. 결국 그의 목을 베어내고 살아남은 사람은 자신이었지만, 이는 수많은 희생을 밟고 올라선 결과일 뿐이었다. ……아마, 자신의 이 생각을 안다면 당보 녀석이 눈을 세모꼴로 뜨면서 내가 댁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아냐는 말부터 시작해서 댁 아니면 누가 천마 모가지를 따겠냐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온갖 잔소리를 쏟아낼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보 녀석은 나보다 약했고, 전쟁이 끝나는 과정에서 팔 한 짝을 잃었지만, 당보는 눈을 하나 잃었고 몸이 많이 무너졌다. 몸이 많이 무너져 예민하던 녀석이 많이 둔감해졌고, 잠이 많아졌다. 눈치는 귀신같은 녀석이라 아무 변화도 없는 제 표정을 보고 눈을 세모꼴로 뜰 녀석이 자느라 못 보는 것은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어린 녀석이라 그런지 잠이 많은데. 자신이 나올 때까지 이불은 미동 하나 없었다. 그러게, 진작 수련 좀 하라니까.
밖으로 나오니 마당에 심은 나무에 매화가 피어있었고, 향기가 물씬 풍겼다. 평생을 화산에 살아 매화 향이 삶에 진득하게 배어있는데도 매년 새로이 개화하는 향은 언제나 새롭다. 새삼스럽게 피어난 매화를 두 눈에 담는다. 아직 날이 추워 가지 위에 흰 눈이 쌓여있었고 무복을 훑는 바람이 제법 쌀쌀하였다. 쯧. 본래의 목적은 바로 수련장으로 향하는 것이었지만, 걸음을 옮겨 방에 불을 조금 더 지펴두었다. 고뿔이라도 들면 옆에서 수발들기 귀찮으니까. 오래 쪼그려 앉아 있어 살짝 저린 다리를 가볍게 두들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약해지긴 약해졌다. 왕년엔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홀로 쓸쓸하게 혼잣말하며 본래의 목적으로 뒤늦게 향했다.
* * *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니 일어날 때만 해도 지평선에 있던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올라 있었다. 온몸이 땀으로 푹 젖은 채로 검을 천천히 내려놓고 납검하였다. 멀리서 하품 소리와 함께 아직도 잠기운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꼭두새벽부터 수련을 지금까지 하십니까? 녀석은 땀 냄새가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와서 어깨 위로 머리를 툭 기댔다. 네가 그러니까 이 시간까지 자는 거 아냐. 본디 미인은 잠꾸러기라고 하던데요. 미인이어야 형님이 예뻐해 주죠. 얼굴에 흉이나 진 놈이 퍽이나.
익숙한 투닥거림이 계속 이어졌다. 종결은 녀석의 배에서 난 위가 요동치는 소리였다. 먹고, 자고 여기 있는 놈이 당가인인지, 개방도인지 모르겠다는 타박에 내가 아니라 형님의 배에서 난 소리라고 아득바득 우겨대었다. 사실 제 배에서 난 소리는 맞았지만. 당보는 찌르면 튀는 재미가 있었기에 끝까지 네 녀석의 배에서 났다고 우겼다. 어이가 없다고 눈을 뾰족하게 뜨고서 밥 먹고 비무로 누구의 말이 옳은지 판별하자고 했다. 예로부터 느껴왔지만 정말 뻔뻔함과 더불어 기상천외한 핑계는 누구도 따라올 수가 없었다. 사천당가는 암기와 독으로 유명하지만, 독랄하고 집요한 성격으로도 유명했다. 이 녀석이 안 그래 보여도 사실 성격이 누구보다 더럽고, 집요하기는 고기를 문 개보다 끈질김을 알았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허풍과 야바위도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합리적인 의심이 들곤 하였다. 꼴에 그래도 암존이라고 불렸다고 잠시 걸음을 멈추고서 눈을 가늘게 뜨고 보자마자 한 발짝 앞에서 걸음을 멈춰서서 뒤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내저으며 성큼 걸음을 앞서자 금세 차이가 벌어졌다. 형님, 같이 가요! 쫓아오려면 금방 쫓아올 수 있는 주제에 꼭 투정을 부리며 따라붙는다. 정말 암존이라는 별호를 처음 입에 담은 사람은 아주 허풍이 심한 놈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지울 수 없어 고개를 가볍게 내젓고서 걸음을 슬쩍 늦추었다.
화산도, 당가도 아닌 외딴곳에 전각을 짓고 사니 식사는 자연스럽게 소박해졌다. 양쪽에서 주는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또한 가끔 마을에 내려가 소일거리를 돕고 생필품 따위를 조금씩 얻어 둘이 사는 일상엔 큰 지장은 없었다. 그래도 화산이야 아무리 술과 고기를 금하지 않는 문파였어도 도문인지라 간이 싱거운 것에 익숙했다. 하지만 당보는 특히 매운 음식을 즐겨 먹고 보통 연초는 삼삼하다고 물소도 한 번에 죽을 독초를 연초로 쓰는 녀석이라 걱정했는데, 걱정이 무색하게도 큰 불평불만 하나 없었다. 나와 산다고 해도 가끔 화산과 당가에 들릴 때마다 실컷 먹어서 그런가. 겉으로 내색하진 않아도 기특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인지라 조만간 화산에 가면 선물이라도 하나 꿍쳐와야겠다고 남몰래 다짐하였다.
* * *
식사 후 약조한 대로 비무를 하였다. 말이 비무지 예나 지금이나 서로 한 번 엿먹이겠다는 개싸움이나 다름없었다. 당보가 한 번 펼치면 수없이 많은 마교도의 목을 꿰뚫고 아군에게마저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던 만천화우가 사실 저를 놀라 자빠지게 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당보가 이렇게 허당인데 이걸 나만 안다니, 세상이 말세였다.
서로 마주 보고 기수식을 취한다. 나는 한쪽 팔을, 당보는 한쪽 눈을 잃었고 몸도 예전처럼 천하에서 제일을 다투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는 부분이 아니었다. 몇십 년을 함께 하였고 생사가 오가는 전장을 내내 붙어 다니며 누빈 만큼. 어쩌면 장문사형보다, 당가보다 서로를 잘 아는 사람이 눈앞에 오롯이 존재했다. 고리타분하고 지지부진한 시작 선언과 규칙 따위는 필요 없었다. 서로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고, 어떤 행동을 취할지 훤히 보였으니까. 박참은 동시였고 비도와 검이 부딪히는 소리도 귓가에 경쾌하게 울린다. 혹자는 비도를 들고 가까이 맞붙는 당보를 어리석다고 비웃을지 몰라도, 세상이 고개를 내저어도 나만큼은 결코 그럴 수 없다. 당보가 전쟁 중 수많은 마교도를 죽이지 않았어도 그의 실력만큼은 당보를 제외하고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으니까.
몇십 합을 맞붙고서 떨어져 짧은 숨을 고른다. 이전이었다면 한참을 더 나누어도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겠지만, 몸의 한계는 이럴 때 선명하게 느껴지곤 하였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이었고, 잃어버린 시간에 미련이 남았지만, 이제는 미련을 버리고 앞을 보는 법을 알았다. 그것을 아주 긴 시간 동안 가르쳐 주었기에, 다시 한 번 발을 박차고 검을 휘두른다. 때마침 부는 바람에 매화나무 가지가 흔들리고, 검에서 피워낸 매화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웅크린 봄이 단숨에 꽃망울을 터뜨리듯 확 피어난 향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웃음소리가 섞여 든다.
* * *
오랜만에 치른 비무라 시원하게 땀을 뺐다. 수련과는 다른 청량감에 기분 좋게 몸을 풀며 욕간에 들어섰다. 화산이 부족한 문파도 아니고 물을 데울 장작이야 충분히 받았지만, 성격이 급해 물이 데워지길 기다리느니 대충 계곡에서 씻곤 하였다. 이렇게 평생 가까이 살다 보니 근처 계곡이나 강에 가서 목욕하는 습관이 들었다. 언제 한 번 물을 데우는 중에 홀랑 목욕하고 왔더니 당보가 얼마나 잔소리하던지. 댁이 개방도냐느니, 기껏 물을 데워줬는데 그걸 못 참고 홀라당 나가버리냐고, 정인 성의를 이렇게 무시해도 되냐고 쏟아내는데 당가에선 딱따구리 화법이라도 배워오나 싶었다. 그리 서운타, 이럴 수 있냐, 정인이 맞냐 울어대니 도리가 있나. 얌전히 들어가는 수밖에.
그렇다고 데운 물이 싫은 것은 또 아닌지라 들어오니 좋긴 했다. 녀석과 마음을 확인한 후 하늘에 부부가 되었음을 고한 후 각자의 문파와 가문에서 나와 따로 집을 지었다. 청진이 아무리 사랑해서 혼인했어도 혼인하면 초반에 많이 싸운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저주를 하라고 쥐어박았는데, 막상 살고 보니 저주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정인으로 몇 년, 친우로 몇십 년을 부대끼며 살았는데 부부로 함께 사는 것은 또 다른 걸 그때 깨달았지. 지금이야 서로 어느 정도 양보하고, 맞추며 적당히 살고 있지만.
과거를 더듬고 있다 보니 어느새 물이 식었다. 욕조에서 나와 뒷정리하고 몸을 닦았다. 머리도 대충 바람에 말리려다 잔소리할 놈을 알아 머리도 얌전히 말리고 방에 들어갔다. 미리 펴둔 이부자리에 들어가 이불을 덮고 호롱불을 껐다.
“당보야. 잘 자라.”
하여튼 정말, 잠이 많은 녀석이라 벌써 잠들었는지 대답이 없었다.
* * *
언제나처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수련장으로 향했다. 한참 검을 휘두르고 있자니 멀리서 익숙한 인기척이 기감에 걸렸다. 그 순간 팔이 멈추었다.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검을 내렸지만, 등은 여전히 입구에서 등진 채였다.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는 걸음이 수련장에 들어선 후에야 천천히 몸을 돌렸다.
“왔냐.”
“간만이네요, 사형. 별일 없었죠.”
“낯간지럽게 무슨. 바쁜 놈이 무슨 일이냐.”
“뭘 새삼. 손님한테 뭐라도 안 내줘요?”
“건방지긴.”
쯧, 가볍게 혀를 차며 검을 납검했다. 때마침 부는 매화 향 품은 바람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조금씩 식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뒤로 따라붙는 걸음이 조금, 낯설었다.
술상을 차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청진이 놈이니까, 크게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고 상대도 일일이 딴지를 걸 쪼잔한 성격이긴 했지만. 뭐, 지금도 내가 더 세니까 조용히 상에 마주 앉았다. 각자 앞에 놓인, 손때가 유난히 탄 잔과 손댄 흔적이 거의 없는 잔에 매화주가 가득 채워진다. 쪼르륵 소리와 함께 매화주 향이 방안을 가득 채운다.
첫 잔은 둘 다 말없이 비웠다. 조잘조잘 쏟아질 목소리가 없었으니, 방안은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상 위로 잔을 내려놓는 둔탁한 소리를 끝으로 기척조차 없다. 서로 마음에 담아둔 말은 있으나 꺼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나는 예로부터 그랬고, 녀석은 괜히 마음 쓴다고 말을 꺼내지 못 하는 것이니 말을 꺼낼 사람은 결국 정해져 있었다.
“……이번에도 오실 거죠?”
“…….”
“이번엔 화산에 좀 오래 머무르세요. 장문 사형도 안 그런 척해도 마음 쓰고 있는 거 아시잖아요.”
“……그래. 그래야지.”
열린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단단한 가지 위로 풍성하게 피어난 매화가 눈에 담긴다. 바람이 불지 않아 올곧게 뻗은 가지가 흔들림 없이 맑은 하늘을 장식하고 있었다.
“언제 오실 거예요?”
“맞춰서 갈게.”
“이왕이면 미리 오세요. 좀 같이 좀 있자고요. 괜히 혼자 못 올 데 온 사람처럼 혼자 있지 알고.”
“…….”
한번 트인 물꼬가 폭포처럼 쏟아진다. 피하지도 못 한 채 푹 잠긴다. 고개를 젖혀도 쏟아지고, 숙여도 뺨을 타고 젖으니, 입만 몇 번 달싹이다 꾹 다물었다. 나쁜 버릇이었다. 예전에는 몰랐으나 알아버렸다. 눈앞에 놓은 문제를 보고 덮어두던 성정은 빛이 바랜 지 오래였다.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외면할 수 없었다. 숨을 길게 내뱉은 후 고개 들어 청진을 마주 봤다.
“생각해 볼게.”
“……알겠어요.”
옳음은 아니었으나 최선이었기에 청진도 더 이상 몰아붙이진 않았다. 여전히 맑은 하늘에 부는 바람이 젖은 몸을 훑고 지나갔다. 아직 겨울이 온전히 지나지 않은 탓인지, 봄이 오기 위한 시련이 유난히 긴 탓인지. 바람이 시려서, 참 추웠다.
“진아.”
“……네.”
“마음은, 어떻게 해야 비우는 거냐.”
“…….”
“아직도, 그 녀석 목소리가 들리는데 어떻게 해야 보내줄 수 있을까.”
도사 형님. 한 잔. 딱 한 잔 마셨는데 시야가 흐릿하다. 흐릿한 시야 위로 당보가 보인다. 청진이 앉아 있는 자리에, 본인이 쓰던 술잔을 들고 웃는다. 아픈 기색 하나 없이, 잃었던 눈 하나도 온전한 상태로 건강하게 웃으며 바라본다. 자자, 한 잔? 도사면서 무슨 풍류가 그리 없답니까. 잔으로 마시면서 담소도 나누고, 이것도 좀 드셔보시고. 예? 독단이냐고요? 에헤이, 저를 뭐로 보시고! 녀석은, 당보는, 환상은 정말 살아있는 사람처럼 막힘없이 말을 쏟아내었다. 아닌 척했어도 네가 하는 말이라 마음 깊이 들은 탓인가. 말을 다 쏟아내면 사라지기나 할 것이지, 제가 아무 대답도 없자 도리어 기이함과 걱정 어린 눈빛으로 쳐다본다.
도사 형님.
“사형.”
두 목소리가 겹친다. 눈을 느리게 끔뻑이자 그래도 결국은, 생자만이 남는지라. 선명한 망막에 맺혀있던 환상이 느리게 흩어지고 청진이 홀로 남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 어린 눈빛. 근 몇 년간 꾸준히 받아오고 있는 눈빛. 제 목숨이 끝이 정해진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 와중에도, 온몸에 마화가 가득해 숨쉬기도 고통스러울 텐데도 기어코 웃는 모습이었고, 그러면서 한 개만 남은 눈으로 안타까이 바라보았던 그 눈빛.
그래서 차마 거짓말이 나오지 않았다. 모든 걸 꿰뚫어 보는 장문사형 앞에서도 뻔뻔하게 거짓말했는데. 도무지 진심을 한 겹, 두 겹, 세 겹. 도톰하게 평온을 덮어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이제는 스스로 익숙하게 술잔을 채웠다. 비웠다.
“정말, 이번 봄도 어김없이 찾아왔구나.”
그 해 첫 매화가 피어난 봄날, 소박하게 피어난 향을 따라 당보는 홀로 먼 길을 가버렸다. 내게서 매화 향이 난다고 할 때는 언제고, 그 향에 혹해 떠나버렸냐고 원망하길 몇 달. 가는 길에 전부 챙겨서 떠날 것이지 누가 허당 아니라고 할까 봐 잔상과 환청을 놓고 가냐고 투덜거리길 몇 년. 쉼 없이 돌아온 기일을 맞이할 시기가 또 찾아왔다. 봄은 부지런히 몇 번이고 돌아오는데, 다시 올 테니 기다려달라고 약조한 놈은 언제쯤 돌아올까.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이 도라더니, 아직도 도가 뭔지 모르겠다.”
“새삼요. 사형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어색해 죽겠습니다.”
“오냐, 네가 나를 안 보고 사니 온몸이 간지럽지?”
일부러 자아내는 비슷하면서 다른 투닥이는 대화에 두 사람의 소리가 울린다. 재차 채워지고 비워지는 잔. 이렇게 채우고, 비워내면 온전히 마를 날이 오겠지. 그러겠지.
* * *
당보의 기일을 기리는 날은 별것 없었다. 꼴에 그래도 세가 놈에, 전쟁영웅이었다고 기일을 성대하게 차려야 한다는 규율이 있었지만 죽기 전 절대 싫다고 어찌나 행패부렸는지 화산과 당가가 만나 식사 자리를 한 번 마련하는 것으로 끝내곤 하였다. 사실 당보와는 정식으로 혼례를 올린 사이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서로 몸이 아프니 오래 식을 못 치른다는 핑계를 대며 장문인을 비롯해 화산의 장로 몇 명과 당보의 직계가족 몇 명만을 불러 식을 올렸다. 그러니 당가에서 구태여 화산을 부르지 않아도 크게 할 말은 없지만 매년 불러줄 뿐만 아니라 먼저 다가와 살갑게 살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당보는 전쟁이 끝나면 가문 좀 제대로 살피고 싶다고 했었다. 하지만 정작 전쟁이 끝나니 몸이 크게 상해 제대로 살피지도 못 하고 가버렸다. 앞에서 내색은 안 했지만 홀로 내내 마음 쓰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받기만 할 수 없고, 화산의 재산을 마음대로 쓸 수 없으니 적당히 보답도 할 겸, 당보의 원도 풀어줄 겸 당보가 쓰던 비도술이나 몇 번 봐주거나 구결을 적어줄까 했는데, 어째서인지 올 때마다 꼬맹이 녀석들의 수련을 주도하게 되었다.
아무리 당보가 본인의 개성에 맞게 개량했어도 뿌리는 본인들이 더 잘 알 텐데도, 길게 머무르지도 않는 기간에 어떻게든 가르침을 구하니 물릴 수도 없어 살피던 일도 벌써 몇 년이 되었다. 그중 두각을 보이는 이가 몇몇 보여 괜히 마음이 흐뭇해졌다. 당보가 봤으면 좋아했을 텐데. 평소엔 뻔질나게 얼굴을 비추다가도 당가에만 오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 철이 들긴 할까.
수련 시간이 지나도록 계속 보아달라 졸라대는 꼬맹이들을 상대하다 보니 몸이 고되었다. 매화검존 위상 다 죽었군. 온몸이 무겁도록 뻐근한데도 잠이 오지 않아 창문을 열었다. 마당 한가운데 심어진 매화나무가 흔들리는 바람 따라 꽃잎을 휘날린다.
밤하늘을 난분분하게 장식하는 매화를 멍하니 바라본다. 날씨도 제법 풀려 따스한 바람이 눈시울을 덥힌다. 열이 오르며 흐릿하게 일렁이는 시야 너머로 녹색 장포가 조금씩 가까워진다. 이 시간에 누가 찾아오는 것이지. 아까 어르신을 너무 오래 붙잡는다고 혼쭐이 나 찾아올 아이는 없었는데.
“도사 형님.”
눈을 깜빡인다. 여전히 바람이 불고 있었고, 흩날리는 매화 꽃잎 너머로 초록 망울이 맺힌 가지, 그리고 사이를 걸어오는 녹색 장포에 은색으로 수놓아진 나비와 모란. 흩날리는 갈색 머리카락. 동그랗게 말아 올린 머리에 꽂힌 몇 년은 보지 못 했던 비녀.
“도사 형님. 너무 늦어서 대답도 안 해주시는 겁니까? 저희 처소 갔다가, 화산에 갔다가 마지막에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당보.”
몇 년 만에 입에 담는 이름이라 어색하지 않을까. 어쩌면 이 또한 제가 욕심에 기어이 끌어내린 환상이 아닐까. 두려움에, 두려워서 더 이상 다가가지 못 하고 네 이름만을 읊조린다. 하지만 너는, 언제나 그랬듯이 다 안다는 웃음을 지으며 내게 훌쩍 다가온다. 연초 냄새. 너와 함께했던 대부분을 차지한 냄새. 그러나 끝은 냄새만 맡아도 쓰디쓴 약재 냄새였다. 고작 일부를 차지한 주제에 마지막이라고 제게 깊숙이 남아 사라지지 않던 약재 냄새를 몰아내고 연초 냄새가 코를 가득 채운다.
“돌아왔습니다.”
“……이 새끼가 빠져서 대체 몇 년을 기다리게 하는 거야.”
“아이, 봐주세요. 제 정인이 천마의 목을 벴고 그에 가장 일조한 사람이 저인데 이게 말이 되냐고 드러누워도 어찌나 꼬장꼬장하던지. 그래도 형님 등선하면 다시 볼 양반들이라 참으려 했는데, 우리 애들보다 답답한 놈들은 처음 봤소. 형님이 추혼비도 챙겨준 덕에 추혼비 들고 대가리를 다 뚫어버리겠다고 얼마나 난리를 쳤는지 모를 겁니다.”
“시끄러워, 늦은 놈이 주둥이가 길어…….”
봄은 돌아오는데 너는 왜 오지 않냐고 원망해 보았지만, 사실은.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임을 알았다. 그저, 그냥. 비워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절벽 한가운데 박힌 바위처럼 떨어질 수 없으니, 시간에 깎여 사라지길 바란 기다림이었다. 그 꼴을 못 보고, 또 기어이 날아와 하얀 날개가 눈가에 아롱아롱 어린 기다림을 걷어낸다.
“보고 싶었습니다.”
“…….”
새하얘서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나비를 붙잡는다. 힘주어 잡아도 바스러지기는커녕 따뜻한 체온을 전해 꿈이 아니며, 제가 박박 긁어모은 미련이 아님을 고요히 알린다. 천천히 손을 펴 제 뺨 위로 올린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버텼으나 결국 무너졌던 마지막과 달리 이번에는 살짝 힘주어 제 뺨을 감싸고 엄지손가락으로 느리게 쓰다듬는다. 아, 정말 네가 돌아왔구나. 항상 그랬듯이. 매번 그랬듯이.
정녕 기다린 봄이 결국 기어이 찾아와, 비로소 만개한 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