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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
추수를 하고 난 뒤면 자연스레 사람의 마음도 풍족해져, 무엇이든 넉넉히 인심좋게 나누고자 함이다. 그러니 이것이 어디 말 한 마리만 살찌고 마는 일일까.
사람으로 치자면 집안의 아이부터 노인까지, 또 앞마당의 병아리부터 시작해 가솔로 쳐 주지 않는 뒷산 여우까지 살찌는 것이 가을의 도리다.
그러니…….
"맛있게 드세요, 도사님!"
"도사님, 이것도요!"
평소 흠모해 마지 않던 이를 모시는 데에는, 사람의 정이 더욱 극진해질 수밖에 없는 법이겠지.
옛말의 유래를 떠올리며 당보는 눈앞에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화음에 내려온 지 반 시진도 안 되었지만, 그와 술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청명의 앞에는 먹을 것이 그득하게 쌓여 있었다. 물론 당보가 주문한 것은 청명이 이미 깨끗하게 먹어치운 다음이었고,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음식들은 오랜만에 매화검존이 화음에 내려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이 새로 가져다 준 것이다.
"……우리 도사 형님, 인기도 많으십니다."
"당연한 소릴."
"좋으시겠수."
은근히 비꼬는 말인지도 모르고 청명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여간, 저 눈치 없는 인간. 입술을 한 번 삐죽인 당보가 술병을 들어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채워지기 바쁘게 청명이 호쾌하게 잔을 비웠다.
"크으, 술맛 좋고."
한 차례 인파가 빠져나간 뒤의 객잔은 소란스럽진 않아도 활기가 넘쳤다. 주위를 빙 둘러본 당보가 다시 청명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어휴, 그래도 이제야 좀 조용히 먹겠네요. 도사 형님 한번 뵙겠다고 오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원……."
"그만큼 내 인망이 높은 거지."
"……그걸 스스로 말씀하시면, 부끄럽진 않으십니까?"
"부끄러울 게 뭐가 있어? 사실인데."
청명이 커다란 접시 한가득 볶아 놓은 회과육을 입 안으로 쓸어넣으며 말했다. 조금 전 한 여자아이(실상은 처녀라거나 여인이라는 말이 어울릴 터였지만 당보의 기준으론 여전히 아이였다)가 청명의 앞에 수줍게 내밀고 간 것이었다.
당보는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걸 그렇게 드세요?"
"맛있으니까."
"그렇게 드시면 맛이 느껴지시긴 하고요?"
"뭔 소리야. 당연하지."
당보는 눈을 껌벅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도무지가, 그의 도사 형님이라는 작자는 사람이 뭘 줄 때 어떤 마음으로 주는지는 상상도 하지 않는 것 같다.
돌산에서 자란 말코라서일까? 눈치없는 걸로도 중원제일인이라 불리기에 충분할 사람이다.
조금 전의 회과육 접시를 포함해 고기 한 점 국물 한 방울 남지 않은 그릇들이 술상 아래에 차곡차곡 쌓이는 걸 보다, 당보는 제 몫의 술잔을 채웠다.
"도사 형님은 섬세함이란 게 별로 없으신 것 같습니다."
"갑자기 웬 섬세함 타령이야?"
"그렇잖아요. 소중하게 가져다 줬으면, 소중하게 아껴 먹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준 사람 입장에서도 기쁘지 않을까요?"
"음식 아껴 먹으면 썩어."
……아니, 그건 또 틀린 말은 아닌데.
"안 그러냐? 내 말이 맞지?"
"그렇게까지 아껴 드시란 뜻은 아니었는데요……."
"맛있게 먹었음 됐지."
당보의 말을 코웃음 한 번으로 흘려보낸 다음, 청명은 남아 있던 술까지 병째 들이켰다. 그리곤 더 남아 있는 게 없는지 슥 확인하더니, 갑자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 먹었지? 일어나자."
"예?"
"일어나자고. 사람들 더 올 것 같지도 않고."
이렇게 바로?
당보는 아직 반 모금 정도 남은 자신의 술잔과 청명의 얼굴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해?"
"아니, 저, 아직 술도 남았고. 근데 지금요? 갑자기?"
청명의 시선이 당보의 손에 들린 술잔에 꽂히나 싶더니, 곧이어 다가온 청명의 손이 술잔을 빼앗아들었다.
그리고 당보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딱 반 모금 남아 있던 술이 청명의 입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탕.
청명이 술잔을 상에 내려놓았다. 그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개미 눈물만큼밖에 안 남았구만."
"……와, 이젠 남의 술까지 뺏어먹어요?"
"빨리 일어나."
재촉하는 청명의 말에, 마지못해 당보는 그를 따라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일어난 것을 보고 객잔 주인이 다가왔다.
"식사는 맘에 드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아, 으응, 맛있었네. 하도 정신이 없었어서,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자연스레 주인은 당보에게 손을 내밀었고, 당보는 그 위에 은자를 올려주다 옆에 서 있을 청명을 힐끔 돌아보았다. 하지만 청명의 모습은 이미 보이질 않았다.
객잔 주인이 조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좀 빠르시네요? 어디 가실 데라도 있으십니까?"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만……."
문 밖에서 청명이 고개를 내밀고 당보를 향해 소리쳤다.
"뭐해? 안 나오고."
객잔 주인이 주섬주섬 돈을 거슬러 주려는 것을 당보는 한 손으로 사양하고 얼른 그를 쫓아 나갔다.
"급하신 모양이니, 나 먼저 감세. 남은 건 아껴 놨다가 다음에 우리 도사 형님 혼자 내려오시면 잘 좀 해드리고."
"아, 예, 물론입죠. 누구 말씀이시라고요."
문 밖, 청명의 기척은 어느새 거리의 끝까지 멀어져 가고 있었다. 당보는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아, 도사 형님! 좀 같이 가요!"
그리고 한참 깊은 산중(山中).
어디를 그렇게 계속 들어가나 했더니, 청명은 첩첩산중 낡디낡은 초옥 앞에서 발을 멈췄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살기는 할까, 싶을 정도로 오래된 초옥이었지만, 청명은 익숙한 듯이 문 안으로 들어서며 주인을 찾았다.
"할멈 없소?"
청명의 목소리에 안에서 희미한 기척이 난다 싶더니, 곧이어 나이든 노파 한 명이 문을 열고 느릿느릿 고개를 내밀었다.
"검존 어르신 오셨어요? 내려오신 줄도 모르고."
그녀가 발랄하게 웃었다. 청명은 고개를 끄덕이곤 당보에게 손짓했다. 당보가 안으로 따라 들어가자, 노인은 그를 알아보곤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암존께서도 오셨네요."
기억을 더듬어 보니, 몇 번인가 청명과 함께 화음에 내려왔을 때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당보는 웃으며 화답했다.
"건강하시오?"
"암요, 건강하지요."
"건강은 무슨."
청명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을 받았다. 영 살갑지 않은 말투에 당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돌아보았지만, 노인은 호호 소리내 웃었다.
"어쩜 좋아. 도사님은 못 속이겠다니까요."
"그럼,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장날인데 할멈이 없는 거 보면 뻔하구만."
"요새 무릎이 아파서요. 시장 나가기가 쉽질 않네요."
"그래서 내가 의원놈 데려 왔잖소."
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당보를 향했다. 당보는 눈을 깜박이다가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저요?"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어?"
잠시 찾아온 침묵을 깨뜨린 것은, 소녀 같은 노인의 웃음이었다.
"암존께서 봐주시면 영광이지요."
청명이 의기양양하게 턱짓했다.
"들었지?"
"……."
"좀 봐줘 봐."
당보는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다가 그녀의 앞에 몸을 숙였다.
"무릎 어디가 어떻게 아프오?"
"아이고, 죄송해라. 이 무릎뼈 아래쪽이……."
당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들었다.
이야기를 들은 뒤, 노인의 무릎을 진료한 결과는 뻔하다면 뻔한 것이었다. 노환으로 인한 관절의 통증. 노환에 근본적인 치료란 없으니 당장 통증을 완화시켜 줄 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당보는 근처에서 구해 올 수 있는 약초를 캐다 약을 만들어 주었다.
"이걸 매일 저녁 한 포씩 물에 개어 드시구려. 통증이 너무 심하면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해서 하루 두 번까진 먹어도 좋소."
"아휴, 감사합니다."
노인이 약포를 품에 소중히 품은 채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무얼 대단히 해 준 것도 아닌데 노인은 송구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고마워했다.
이쯤이면 슬슬 자리를 뜰 때인 듯 싶어 일어나자, 노인은 잠시만 기다리라며 집 뒤편의 창고로 들어가더니 조그만 자루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마를 좀 캤어요. 두 분 드셔요."
"아니, 할멈 먹을 건 있어야지."
당보는 자연스럽게 받아들려 손을 내밀었지만, 무슨 일로 청명이 사양을 했다. 당보가 어정쩡하게 내밀었던 손을 거두어 들이려는 찰나, 노인이 냉큼 당보의 손에 자루를 쥐여 주었다.
"저는 또 따로 있지요. 무릎도 봐 주시고, 예까지 찾아와 주셔서 감사한 마음에 그래요."
"그래도 없는 살림인데."
"없는 살림이라뇨. 이 산에 먹을 게 얼마나 많은데요."
청명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진짜 괜찮은 거 맞소? 창고 검사를 해 봐야겠는데."
"괜찮다니까요. 정 그러시면 보고 가세요. 올해가 어찌나 날이 좋았는지, 초목이 다 쑥쑥 컸어요."
눈을 가늘게 뜬 청명이 앓는 소리를 냈다.
"끄응……."
그걸 보던 당보가 피식 웃었다.
평소 당보를 포함해 다른 문파의 사람들 앞에선 막무가내로 구는 인간이, 양민들이나 특히 이런 노인들을 앞에 두면 순해지고 마는 게 우스웠던 탓이다.
"고마워서 주는 거라니 사양은 하지 맙시다."
"……."
당보의 말에 청명이 눈을 잠깐 흘겼으나, 이윽고 포기한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게 받겠소."
노인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맛있게 드셔주세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먹죠?"
내려가는 길, 당보는 마 자루를 들어보이며 물었다. 옆에서 느릿느릿 걷던 청명이 말했다.
"삶아 먹기도 하고, 쪄 먹기도 하고."
"흐음."
"그냥 날것으로도 먹어. 말려서 갈아먹기도 하고……."
"다른 방법은 없소?"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청명이 입을 열었다.
"구워먹기도 하지."
"오."
청명이 당보의 손에 들려 있는 마 자루를 돌아보았다.
"얼마나 되냐?"
"한, 여섯 개쯤?"
"마침 출출하니, 그냥 가져갈 것 없이 먹어버릴까."
중얼거린 청명이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적당한 공터를 찾아 발을 옮겼다. 당보도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당한 곳이 나왔다. 청명이 마른 가지를 주워 오는 동안 당보는 비도를 꺼내 청명의 말대로 껍질을 깎았다. 요리되어 올라온 것을 본 적은 있어도 실제로 직접 깎아보긴 처음이었다.
"으, 이거 끈적끈적해졌어요."
"원래 그래."
당보가 마의 점액질로 끈적해진 비도를 들어보였지만 청명의 반응은 별 대단한 일도 아니라는 식이었다. 당보는 입술을 삐죽였다. 하여간 말코. 물론 마음속으로 한 말이었다.
"줘 봐."
모아온 나뭇가지에 삼매진화로 불을 붙인 그가 당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당보가 껍질을 벗겨 놓은 마를 하나씩 나무 꼬치에 꿰어 굽기 시작했다.
불 앞에 앉은 그의 얼굴이 발갛고 환하게 빛나는 걸 지켜보던 당보가 입을 열었다.
"……아까 객잔에서 일찍 일어나자고 한 이유가 그 집 걱정 때문이었소?"
"가뜩이나 산골 사는 노인네가 안 보이니 그랬지."
청명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당보는 키득대며 웃었다.
"아닌 척 상냥하시다니까."
"상냥은 무슨. 다 눈앞에 있던 게 안 보이고 그러면 신경 쓰이는 법이지."
"정말요? 아니신 것 같던데."
"……뭐 또 비꼬려고 그러냐?"
겉면이 파삭하게 구워진 마 꼬치를 집어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던 청명이 당보의 앞에 꼬치를 내밀었다.
"잔소리 말고 먹기나 해라."
"도사 형님은요? 안 드십니까?"
"난 더 구워서 먹을 거야."
당보는 꼬치를 받아들었다. 직접 불에 대고 구운 탓에 곳곳이 좀 타 있긴 했지만 냄새는 고소해 절로 침이 고였다.
"앗, 뜨거!"
한 입, 조심스레 베어문 당보가 비명을 질렀다. 그걸 돌아본 청명이 킥킥 소리내 웃었다. 보아하니 그걸 노리고 당보에게 먼저 하나를 건네 준 모양이었다.
"입 다 데일 뻔했어요!"
"그러게, 누가 앞뒤 안 가리고 입에 넣으래? 암존이라는 놈이 생각 없이 구니까 그러는 거야."
"조심하라고 한 마디 해 줘도 되잖아요?!"
"내가 왜?"
청명이 어깨를 으쓱였다. 밉살맞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당보는 눈을 흘기며 후후 숨을 불었다.
"그리고 원래 이런 건 좀 뜨겁게 먹는 게 제맛이지."
바싹 구워진 탓에 그을린 겉면을 익숙하게 손으로 벗겨낸 청명이 드러난 속살을 한 입 깨물었다. 당보는 그를 열심히 노려보았지만, 청명은 뜨겁다는 내색은커녕 맛있게 마 꼬치 하나를 쓱싹 해치웠다.
"더 안 먹어?"
"……하나만 더 먹을래요."
이번엔 당보가 직접 남아 있는 것 중 하나를 골라 집어들었다. 그리고 조금 전 청명이 한 것처럼 탄 겉면을 벗겨내고는,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 한 입 베어물었다.
여전히 뜨겁긴 했지만 열을 가두고 있던 겉껍질을 벗겨내고 식히니 훨씬 나았다. 조금 전에는 뜨거워서 무슨 맛인지도 모르게 먹었는데, 식힌 다음에 먹으니 속은 고소하고 부드러웠다. 거기다 제법 포만감도 있어, 두 개만 먹어도 간식으로 충분할 듯싶었다.
"……풉."
세 개째의 마 꼬치를 집어드는 청명을 바라보던 당보가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서 난 소리에 청명이 당보를 돌아보았다.
"풉, 푸하하하!"
정면으로 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당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도 그럴 것이, 불 바로 앞에서 마를 구워대는 바람에 청명의 얼굴이며 손에 검댕이 잔뜩 묻은 것이다. 화음 사람들이 헌앙하다고 추켜 올리기 바쁜, 그렇지만 당보도 가끔은 좀 시원시원하게 생기긴 했다고 생각하는 얼굴에 어린애처럼 검댕이 묻은 꼴이란 그저 우습고, 또 한편으로는…….
조금이긴 하지만, 귀여웠다.
"어, 얼굴이, 그게 뭐예요, 푸하하, 하하하!"
"뭐가?"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한참이나 웃음을 참지 못하는 당보를 영 수상쩍게 쳐다보던 그가 손등으로 코밑을 벅벅 문질렀다. 하지만 이미 검댕이 콧수염처럼 묻어 있던 자리를 문질러대는 통에, 청명의 코밑에 긴 일자 수염이 생겨버렸고…….
그걸 본 당보는 한층 더 뒤집어져 이제는 거의 흐느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새끼가 진짜 혼자만 아는 걸로 쳐 웃고 난리야?"
거의 숨 넘어갈 듯이 웃던 당보는 그제야 청명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살벌하기 그지없는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결국 몇 대를 얻어맞은 다음에야 당보는 입술을 삐죽이며 청명의 앞에 바로 앉았다. 그리곤 장포 소매로 그의 얼굴에 묻은 검댕을 닦기 시작했다.
"……검존이나 되시는 분이 몰래 집안 곡식 구워먹는 어린애마냥 얼굴에 검댕을 다 묻히시고 계시니 안 웃고 배기겠습니까?"
"이 새낀 아직도 반성을 덜 했어? 형님이 그러고 계시면 혼자 쳐 웃고 있는 게 아우놈이 할 일이야?"
청명은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당보의 손에 얼굴을 맡긴 채였다. 당보 역시 반박할 말은 많았지만 막상 그의 손에 얼굴을 맡기고 앉아 있는 걸 보니 이상하게 미운 말이 쏙 들어가버렸다.
왜일까?
이 사람이 답지 않게 순순하게 굴 때, 마음 한 켠이 간질간질해지는 건.
이마와 콧등, 콧날, 뺨, 눈가, 입매 등 장포 소매로 검댕을 닦아준 당보는 두 손으로 청명의 얼굴을 감싸쥐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다행히 검댕은 더 묻어 있지 않았다.
"됐습니다."
"어."
"도사 형님 덕에 제 장포는 까매지고, 형님 얼굴은 하얘지고."
그리고 다시 정면을 보게 하는데.
묘하게도, 제 손에 뺨이 눌린 청명의 얼굴이 제법 깜찍해 보였다.
평소 이 양반의 얼굴이란 하도 조목조목 뜯어보게 되곤 하는 탓에 그렇게 의식한 적이 없었는데…….
왜인지 몰라도, 그 순간 무언가 몸이 절로 움직일 것만 같으면서.
"……뭐 하는데?"
당보를 빤히 쳐다보던 그가 뭉개진 발음으로 그렇게 웅얼거렸다. 당보는 눈을 깜박이며 그런 청명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뭐……."
그리고.
청명이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
당보는 그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입맞춤은 찰나였고, 당보는 금방 몸을 물렸다.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보는 자신이 뭘 저질렀는지도 명확히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청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이, 이, 이 미친 새끼가-! 이 새끼가 지금 뭐하는 짓이야!?"
냅다 도망치기 시작한 당보의 등을 향해 그가 소리를 질렀다. 물론, 그가 무어라 소리를 지르며 쫓아오든 말든 당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당보는 자신이 벌인 일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말이 살찌는 이 묘한 계절은, 사람의 마음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살을 찌워버리는 걸까?
얼굴은 터져버릴 것 같았고, 손끝 발끝이 화끈거렸다. 스스로도 가슴 한 켠에서 치미는 열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당보는 얼굴을 감싸쥔 채 앞만 보고 내달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로 빠져들기라도 할 듯, 그의 몸이 허공을 가르며 산중을 날았다.
사랑을 자각한 순간이었다.






.•° ✿ °•.
바람을 타고 붉은 단풍잎 하나가 강물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 중심으로 작고 둥근 물 파동이 그려지는 것을 눈에 담은 청명은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강과 같은 푸른색의 높은 하늘, 그 하늘에 떠내려가는 듯 바람에 날아가는 단풍잎들, 술이 저절로 들어갔다. 익숙한 쓴맛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할 때쯤, 자신을 부르는 쪽으로 고개만 움직였다.
단풍과 같은 붉은 비녀를 하고 있는 남성, 당보가 청명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을 덤덤하게 보며 청명은 다시 한번 더 술병을 물었다. 그 모습에 당보는 술병을 낚아챘다. 그제야 청명은 당보를 똑바로 보았다.
"도사 형님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 기억납니까?"
"어. 대충 장로들이 문제라고 했던가?"
"…틀리지는 않았는데, 흠흠 그래서 말입니다! 그놈들이 그놈의 독이 더-.."
당보의 말을 한 귀로 들으며 청명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풍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손엔 어느새 당보가 뺏어든 술병이 들려있었다. 또다시 자기 말을 듣지 않은 청명에게 당보는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눈을 반짝이며 보는 모습에 입가가 조금씩 올라왔다.
“도사 형님, 마음에 드십니까?”
"그래 …. 오길 잘했어."
두 사람 사이에 작게 바람이 불었다.
**✿❀ ❀✿**
오늘도 청명은 평소와 다름없이 청문의 눈을 피해 화음에 내려와 객잔에서 술 한잔하려고 했었다. 몰래 나온 거니 들키기 전에 서둘러 경공을 쓰기 위해 자세를 잡던 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눈앞에 녹색 장포가 들어왔다.
“당보?”
"도사 형님!"
급한 일이 있어 당가로 돌아간다던 녀석이 제 눈앞에 있자 눈을 끔뻑거리던 청명의 앞에 당보가 코앞까지 서서 소매로 입을 가리고는 헛기침을 연신 해댔다. 고뿔이라도 걸렸나? 눈을 가늘하게 뜨고 있으니 당보는 더 크게 웃었다.
당보는 각 소매에 양손을 하나씩 넣고 다가오고 있었는데, 모습이 마치 부모 몰래 물건을 몰래 가져온 모습 같았다.
“마침 도사 형님 뵈려 화산에 가려 했는데 여기서 다 만나네요.”
“화산에? … 너 설마 산채라도 발견한 거냐?”
“흐흐 산채보다 더 좋은 게 있습니다.”
실실 웃은 당보가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이자 무신경한 표정을 짓던 청명의 눈이 반짝였다. 당보가 보인 것은 당가 문양이 그려진 작은 술병이었다. 그 문양이 새겨진 술은 청명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건 설마…. "
“맞습니다. 역시 도사 형님, 눈치가 빠르네요!”
“이 자식! 잘했어!”
청명은 크게 기뻐하며 당보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당보가 가져온 이것은 사천당가의 가주가 직접 빚은 술을 표시한 물건이었다. 보통의 백주와는 달리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독주(毒酒)로, 가주만이 알고 있는 장소에 숨겨두었는데 그 물건이 지금 당보의 손에 있었다.
그것을 낚아채 유심히 보던 청명은 당보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그 속에 감정이
“그거 말고 더 있는 거지?”
“당연하죠! 가주가 꿍쳐놓은 걸 겨우 찾았는데!”
“좋아! 당장 화산으로 가자! 들키기 전에 얼른 마셔야지! 낄낄!”
“도사 형님 오늘은 제가 따로 장소를 알아뒀으니 따라오세요!”
하긴 화산으로 가면 자연스럽게 가주 귀에 들어가려나…?
속으로 긍정을 한 청명은 경공을 쓰며 먼저 앞서가는 당보를 뒤따라 경공을 썼다. 한참을 그렇게 달렸을까, 그들이 도착한 곳은 황하(黃河)로 이어지는 강의 나루터였다. 작은 지붕이 붙여진 배와 그 주인인 뱃사공이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자 익숙하게 배와 나루터 사이에 나무판자를 올렸다.
“배? 이번만큼은 가주한테 걸리면 죽나 보지?”
청명은 배를 뚫어지며 말하자 작게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게 아닙니다. 이 당보가 이곳의 절경이 이맘때 가장 아름답다고 들으니 도사 형님이 생각나서 급하게 준비했습니다. 가끔은 이런 곳에서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죠?”
“흠…. 아름답다라…."
아직 주변에 나무밖에 보이지 않자 청명은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배라... 항상 당보 녀석과 마시면 당가의 평상이나 언제나 사람이 북적이는 객잔에서 마셨었는데... 한참을 배를 보는 청명을 당보는 옆에 슬쩍 서서 팔을 툭툭 쳤다.
"설마 도사 형님…뱃놀이 처음ㅇ…“
“기어오른다?”
“아하하….”
얼버무리며 웃는 당보를 두고 청명은 배의 내부를 살펴보며 배에 올랐다. 생각보다 넓은 배에는 낮은 지붕과 낮은 작은 상이 놓여있고, 그 구석엔 술병들이 놓여있었는데 그 중 당보가 들고 온 술병과 똑같은 술병 몇 개가 놓여있었다.
찾던 것이 보이자 청명은 바로 자리에 앉아 술병을 흔들더니 입꼬리를 올려 마개를 열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입에 넣자 당보가 서둘러 말리는 소리가 들렸고, 마지막으로 오른 뱃사공이 천천히 노를 저어 움직였다. 청명은 옆에 놓인 술병을 쥐고는 고개를 돌려 절경을 눈에 담았다.
**✿❀ ❀✿**
청명의 표정을 확인하고 만족한 웃음을 짓던 당보는 한쪽 소매를 잡고, 강물에 손을 살짝 집어넣었다. 배의 움직임에 맞춰 손을 타고 작은 물길이 만들어지더니 단풍 하나를 건져내곤 청명의 얼굴과 번갈아 보았다.
"가끔은 이렇게 마셔야죠. 허구한 날 객잔에 마셔도 이 맛이 안 날 겁니다."
청명은 당보의 말에 끄덕였다. 처음엔 그저 나무와 강밖에 없던 곳에서 얼마 안 가 커다란 강줄기를 중심으로 주변의 커다란 돌 절벽과 그 높은 곳에서 자라고 있는 몇 그루의 소나무와 강가에 있는 계절에 맞게 붉게 변한 단풍나무가 장관을 이루었다.
당보는 아까전 건져낸 단풍을 청명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술로 인해 붉은 볼과 단풍이 같아 보여 웃었다.
“누가 단풍인지 모르겠네요.”
“술병으로 대가리 깨지고 싶으면 계속 말해.”
“자 그럼 저도 그럼 슬슬 나도 마셔…. 아?"
단풍을 던져버리고 술병을 찾는 시늉을 하던 당보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분명 한가득 실은 술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중에 가주가 빚은 술병도 보이지 않자 당보는 급하게 청명을 돌아보았는데, 그의 발치에 굴러다니는 병들을 눈 씻고 봐도 저것은 분명한 당가 문양이었다.
설마 지금 저 양반이 얼굴이 붉은 건 저걸 혼자서 다 마셔서?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저 독주를 다 마셨다고? 저번처럼 쓰러지려고? 그 전에 이 말코가…. 내 몫은 안 남기고 그걸 다 처먹어? 당보는 혹여나 조금이라도 남아있을까 굴러가는 술병을 하나하나 주워들었지만 역시나 다 빈 병이었다.
"출발한 지 아직 한 식경도 안됐는데 그걸 다 마셔요?! 그 많은 양을 혼자서?!"
"너 오래간만에 보더니 내 주량을 그새 잊었냐? 고작 이 정도 양으로 마시자고? 새로 가져와!"
"여기서 무슨 수로 가져와요! 그걸 왜 혼자서 다 마시냐고! 이 말코가!"
찰랑- 찰랑-
당보의 언성에 청명은 쥐고 있던 병을 흔들며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다시 병을 입에 물었다. 손가락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당가 문양, 그 모습에 놀라 당보는 청명의 손에 들린 병을 서둘러 뺏어 들어 병 입구를 거꾸로 들어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지만, 그새 마지막 한 모금을 마셨는지 작은 술 방울이 몇 번 떨어지더니 더는 나오지 않았다.
당보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손을 얼굴에 덮었다. 이 말코가 단단히 사고 쳤구나…. 당보는 몸을 돌리지 않고 뱃사공을 불렀다.
"하…. 뱃사공 미안하지만, 뱃머리를 다시 돌리게."
"네? 벌써 말입니까? 출발한 지 아직 한 식경도 안된 거로 압니다만…."
"급한 문제가 생겨 우선 돌아가지. 내 값은 두배로 내겠네."
값을 준다는 말에 결국 뱃사공은 짧게 대답하고는 노를 가던 방향과 반대로 저었다. 물살이 바뀐 것을 확인한 당보는 청명의 옆에 힘없이 앉았다. 우선 약재를 조금 구해보는 게 나을까. 저번처럼 쓰러진다면..
당보의 표정을 살피던 청명이 당보의 어깨에 팔을 둘러 자신의 품에 넣었다. 뺨에 익숙한 감촉이 느껴지자 살짝 주먹을 쥐어 가슴을 쳤다. 아야…. 아프지도 않잖아요.
"그걸 몰래 가져오느라 고생했는데 그걸 다 마셔요? 혼자서?"
"맛있더라. 잘 가져왔네."
"맛있 … 뭐 입에 맞았다니, 아니 그전에! 몸은 괜찮아요!?"
당보는 다급하게 청명의 얼굴 목을 차례대로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도복 옷깃을 약간 젖혀 그 안쪽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독에 중독된 증상이 보이지 않자 잡고 있던 옷깃을 놓고는 바르게 놓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는 의약당이 근처에 있어서 다행이지 이 강 한가운데에 이 말코를 아무런 약초도 없이 해독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찔했다.
그때 당보의 손을 덮어오는 온기가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청명이 당보의 손을 잡고 있었다. 당보는 다시 제 손을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떨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
“괜찮아?”
“…네. 누구 때문에 제 명에 못 살 것 같지만.”
“흐음 이거나 마셔라.”
청명이 건넨 건 익숙한 술병이었다. 도사 형님과 만났을 때 내가 보여줬었던, 저 문양은… 당가…?
당보는 눈이 커진 채로 청명을 응시했다. 청명은 당보의 시선을 피한 채 목덜미를 매만지며 다시 고개를 돌렸지만,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남겨뒀어. 그건 너도 마시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도사 형님.”
“이 형님밖에 없지?”
낄낄 웃는 청명을 보며 당보는 벌어졌던 입을 겨우 다 물었다.
그때 뱃사공이 도착을 알리는 말과 함께 배의 움직임이 점차 느려졌다. 청명이 술병 마개를 열고 마시려는 걸 당보의 손이 막았다. 눈썹을 까딱한 청명은 당보를 보자 조금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사 형님."
“엉?”
“잠깐, 이 당보와 어울려주세요.”
어울려? 청명이 이해하기 전에 당보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고 곧 익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조금씩 눈이 커진 청명과 달리, 당보는 그 모습을 보며 눈웃음을 짓고는 떨어졌다.
"뭘 그렇게 놀랐어요."
"ㄴ…너! 이런 곳에서 그걸 하고 싶어?!"
"하하. 뭘 새삼스럽게…."
잠시 뒤 배가 나루터에 도착하고 뱃사공이 나루터와 배 사이에 나무판자를 두는 소리가 들렸다. 홀로 배에 내린 당보는 뱃사공에게 근처 객잔과 약초방의 길 안내를 부탁했다. 뱃사공은 짧게 읍하며 당보의 뒤를 따라가다 아직 일행이 한 명이 내리지 않은 걸 깨닫고는 당보를 조심히 불러세웠다.
"저 손님. 실례지만 도사님은 홀로 두어도 괜찮습니까?"
"아…. 그 양반은 괜찮네. 뱃사공, 근처에 회과육을 잘하는 곳도 있는가?"
"네. 안내하겠습니다."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한 뱃사공은 서둘러 발을 움직였다.
아까 일로 술이 완전히 깨버린 청명은 홀로 배 안에 남아 누워있었다. 하늘은 변함없이 푸르렀다. 당보가 쥐고 있던 단풍을 잡고 손으로 돌리던 청명은 당보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잠깐은 무슨.”
그 장난스러운 얼굴과 달리 녀석의 귀는 이것과 같은 색이었다. 코웃음을 치고는 하나 남은 술병을 흔들었다.
“누가 단풍인지 모르겠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내 단풍은 언제 오려나.”
곧 뱃사공과 함께 술병들과 안주, 혹시나 모를 약초를 준비한 당보가 몸을 휘청거리며 배에 오르자 배가 물길을 만들며 나루터를 벗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