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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잦은 계절이 왔다.
망할 놈의 하늘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도 해가 쨍쨍하던 하늘이 바로 다음 순간 수틀리기라도 한 것처럼 우르르 천둥번개를 몰고 와 비를 왕창 쏟아내니, 사람들은 수시로 비 그을 곳을 찾아 우왕좌왕 야단들이었다. 그리고 그건 당보와 청명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거 지랄같이도 쏟아지네.”
간신히 아름드리 나무 밑으로 비를 피한 당보가 중얼거렸다. 제아무리 고강한 무위를 가진 절정고수래도 비에 맞으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내력으로 옷 말리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기나긴 장마철 내내 내력을 낭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청명은 당보의 옆얼굴을 흘끗 곁눈질했다.
“여름이니까.”
“그놈의 여름.”
돌아오는 소리가 곱지 않다. 청명이 픽 웃었다. 오늘따라 저거 또 왜 저렇게 꼬였어. 비가 쉬이 그칠 거 같지 않아 청명이 나무에 기대 앉았다. 당보는 고집스레 머나먼 지평선만 넘어다 보고 있었다. 그게 꼭 앵돌아진 채 저 좀 알아봐달라고 시위하는 어린애 같아, 결국 청명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또 뭐가 문젠데.”
당보는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가 꾹 다물었다. 침묵이 이어지자 청명이 몸을 뒤로 쭉 뻗어 기지개를 폈다. 말하기 싫으면 마라. 청명은 그렇게 말하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세상 시름은 다 지워지고, 비 쏟아지는 소리만 남아 온 삼라를 두드렸다. 멀지 않은 논바닥에서 개구리가 울어댔다. 그리 고요하지 않은 적막을 뚫고 한참만에 당보가 말했다.
“.......새끼들이 사사건건 시비를 걸잖습니까.”
눈을 뜬 청명이 당보를 올려다보고는 킥킥 웃었다.
“그렇게 대가리가 깨졌는데?”
“그러게나 말이오.”
당보가 신경질이 난 얼굴로 소매에서 장죽을 꺼냈다. 장죽 머리에 연초를 채우고 불을 붙이는 손 끝에 짜증이 묻어났다. 청명이 별 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한번에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잖냐.”
“거야 그렇지요.”
장죽을 깊게 빤 당보가 마치 홀로 겨울의 어느 막에 선 것처럼 흰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냥, 속이 터집디다. 그걸 다 아는데도 속이 터져요. 수십, 수 백년 묵은 가규며 악습이 절로 변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린 것들은 암기술을 갈고 닦아보겠다고 찾아오는데 나잇살 처먹은 것들은 장님에 귀머거리 행세까지 해가며 버티는 꼴을 보니 속이 뒤집어져서 참을 수가 없소.”
“.........”
“가문의 어른이란 것들이 어린 것들 앞길을 제 손으로 틀어막고 자빠졌으니......”
당보가 다시 장죽을 물었다. 흥 하고 청명이 코로 웃었다. 변화가 무쌍한 것이 창상세계라지만, 천고가 불역하며 만세불변한 것 또한 세상사였다. 세상은 매사에 저 흐르던 대로 흐르려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당가는 저 하던 대로 늪물처럼 고여 있었으니, 청명이 당가타로 쳐들어가 노인네들 대가리 좀 깼다고 별안간 당가가 천지개벽하여 독 대신 암기술에 심기일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다 아는데도, 속이 타는 건 별 수 없는 일인 모양이었다.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있었다.
대꾸도 없는 개말코에게라도 털어놓았더니 기분이 좀 나아진 모양인지, 당보가 조금 멋쩍은 얼굴로 장죽을 거꾸로 뒤집어 털어댔다. 가벼운 담뱃재가 팔랑팔랑 풀밭 위로 떨어졌다. 몇 번 빨지도 않았는데 헤프기도 하지. 당보가 조용히 궁시렁거렸다. 청명은 대거리 없이 슬슬 몸을 일으켰다. 나무 끝에서 죽죽 흐르던 낙수가 금세 잦아들고 있었다.
“술이나 마시러 가자.”
“아무렴요.”
당보가 나무 그늘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갠 하늘에 성마른 태양이 벌써부터 구름 틈에서 번득이고 있었다. 당보가 완전히 나무 그늘을 빠져나가기 전에, 아직도 나무 기둥 밑에 선 청명이 그를 불렀다.
“야.”
“예?”
당보가 그늘 끝에서 청명을 돌아다보았다. 순간 청명이 개구지게 웃더니, 번개같이 발을 들어올려 나무를 콱 걷어찼다. 쿵! 거센 발길질에 그 커다란 나무가 부르르 진동하고, 나무 밑에 뒤늦은 소나기가 쏟아졌다.
“아악! 아, 형님!”
빗물에 홀딱 젖어버린 당보가 빽 소리를 질렀다. 기껏 비를 피했더니, 말코새끼 심보 하고는! 그늘 밑에 선 청명이 낄낄 웃었다.
“이 멍청한 놈아, 내가 그랬지. 대가리도 나쁜 게 자꾸 고민하지 말라고. 끙끙 앓아봤자 어디 답이 나오든?”
“.........”
잎새 사이사이로 그물같이 드리운 햇살 아래 청명이 미소지었다.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하면 돼. 두 번으로 안 되거든 세 번 하면 된다. 몇 번이고 좋으니 될 때까지 몰아붙여. 그리 머리 아플 일도, 괴로울 일도 없다. 그냥 계속 하면 돼. 이미 바뀌기 시작했으니까.”
“.........”
“여차하면 나도 있고.”
그러니까 쓸데없이 앓는 소리 마라.
청명이 흥 하고 웃었다. 꼭 비가 갠 뒤 고개를 내미는 태양처럼, 청명은 그늘 밑에서도 홀로 빛나고 있었다. 당보가 그늘 끝에서 청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만장생광이로구나.
뭘 멍하니 서 있어? 술 안 마실테냐? 청명이 그새 다가와 당보를 툭 밀쳤다. 넋 놓고 있던 당보가 꿈에서 막 깬 사람처럼 부스스 웃었다. 갑시다. 늘 가던 곳으로 가시렵니까? 어느새 쨍하니 빛나기 시작한 햇살 속으로 두 사람은 발을 내딛었다.
비가 언제 왔냐는 듯, 매미가 다시 귀 따갑게 울어젖히기 시작했다.








“형님 기억나십니까?”
비가 잔뜩 내려 안개가 잔뜩 끼고 습한날이 계속 되고 있었다.
“뭐가”
당보는 술잔을 내려놓고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한참을 머물고 있던 술잔이지만 여전히 가득 차 있었다.
“전쟁할 때 말입니다”
“그걸 뭣하러 기억하냐. 좋은 기억도 아닌걸”
그렇게 이야기하는 청명의 손은 흔들렸다.
전쟁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목숨이 가장 중한 것이라 여기지만 어쩌면 목숨을 뺀 모든 것을 잃은 것이 아닐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말입니다, 이런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
정마대전이 한창이던 그때 그때도 한여름이었다. 매미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그런 여름, 그토록 조용하던 여름은 처음이었다.
“하아- 지금은 과일이나 먹으면서 발 뻗어지게 자야 하는데”
청명은 얼굴에 묻은 피를 대강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전쟁이 조금만 더 있으면 끝난 다라며 사람들이 말하기는 했지만 막상 전쟁을 하는 그들은 대체 얼마나 더 해야 하는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더 이상 몇을 죽였는지 몇이나 죽어나갔는지조차 헤아릴 수 없었다.
“형님, 전쟁이 끝나면 바다에 가봅시다”
당보는 피로 젖은 장포를 펄럭거리며 청명에게 다가왔다.
“해남?”
“뭐, 거기도 괜찮고 바다에 가봅시다. 우리가 몇십 년을 살았지만 바다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게 말이 됩니까”
“그래, 그렇긴 하네”
청명의 말이 끝나자 하늘에서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다 순식간에 하늘을 잔뜩 흐리며 내리기 시작했다.
“비 오네”
“그러게요, 여름비는 잠비라던데”
“잠은 무슨, 잠자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시원한 술 한 잔만 하고 싶네”
“저도요”
*
쉴 틈 없이 몰려오는 적을 베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 걸음 끝에 전쟁의 끝이 있기를 바라며, 평화가 찾아오길 바라며 협의를 담은 칼은 어느 순간부터는 생존을 위해서만 움직인다.
협의가 무언지, 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하기 힘든 날이 계속되었다. 동시에 습하고 뜨거운 태양빛은 더더욱 그들을 힘들게 했다.
“하아-하아-”
청명은 직감했다. 저게 천마임을 저 목만 베어낸다면 전쟁은 끝임을 청명의 칼은 천마의 목을 겨눴지만 이미 기력이 다했기에 그의 칼은 천마의 목을 베어내지 못했다.
“아- 이런”
청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혹, 절망,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멍하니 서있으며 죽음을 직감했다.
‘나만은 끝까지 살아남을 거라 여겼는데 그것마저 내 오만이며 욕심이었나 보다’
그 순간 뒤에서 날아온 비도, 아니 칼이 날아왔다. 언제나 그의 뒤를 지켜왔던 칼이 천마의 목을 베어냈다.
놀라 고개를 돌리자 전우이자 친우이며 정인인 그가 그곳에 있었다.
“하아-하아, 형님 살아있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당보의 얼굴은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땀과 피로 잔뜩 젖어있었다.
‘제 눈에서 피가 흐르는 와중에도 정확하게 던지는 걸 보니 저놈도 당가긴 하네’
“그래- 살아있다, 이 미친놈 칼을 비도처럼 던지네”
”형님--!“
청명은 그 말을 끝으로 기력이 다해 그대로 정신을 놓았다.
그렇게 기절하면서도 청명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당보를 향해 끝까지 눈을 맞추었다. 눈을 떼면 그가 사라지기라도 할 듯이.
*
“형님-! 형-”
전쟁이 끝나고 전쟁의 여파가 끝나갈 때쯤 여름의 막바지에 눈을 뜬 청명의 눈앞에는 당보가 있었다.
청명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당보를 보고 해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 죽었네?”
당보는 무슨 말을 하는가 싶어 청명을 멍하게 바라보다,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중원 제일인을 살렸으니 이제 제가 중원제일인가요”
“하하- 그게 뭐가 중요하냐, 당보야 네가 살고 내가 살았으니 그게 다지”
“오- 그럼 이제 제가 중원제일인합니다”
당보는 청명에게 한 대 얻어 맞고 나서야 입을 삐죽 내밀고 입을 닫았다.
당보는 가볍게 청명의 볼에 입을 맞추고 붕대를 갈아주었다. 팔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있었지만 청명의 말처럼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청명은 정성스레 자신의 상처를 봐주는 당보를 내려보다 입을 열었다.
“당보야, 바다에 가자”
“허?”
당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청명을 쳐다보았다.
“지금요?”
“어”
당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이야기했지만 누가 청명의 고집을 꺾겠는가.
그날 해가 질 때쯤 말 두필이 당가의 마구간에서 사라졌다.
*
둘은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를 쳐다보았다. 하얀 파도가 만들어지고 부서지는 걸 바라보며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먼저 입을 연건 청명이었다.
“이게 바단가?”
“그런가 봐요“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바다의 위엄에 압도되어 둘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다를 쳐다보았다.
“별거 없네”
청명은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당보는 말없이 한참을 바다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당보를 바라보았다.
매일 보는 얼굴이었지만 매일 다른 생각이 들었다. 쉴 새 없이 바쁜 틈 새에 서로를 기둥 삼아 살아 온 날이 수십년이다.
그 수십 년 동안 당보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고 나도 마찬가지 였다.
“좋다”
청명의 낮은 중얼거림에 당보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뭐라 했습니까 형님?”
“좋다고”
“그러게요, 좋네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기분이 좋아졌다 헤실 거리며 당보와 청명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 말 안 듣고 무리해서 바다까지 온 청명이 기절해 당가까지 말에 얹혀서 간 건 비밀이다
*
당보는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탁상에 놓인 술을 들이 마셨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 그리고 네 말 안 들은건 미안하다 했잖아”
“아, 그냥 바다에 또 갈까 생각이 들기도 하고, 좋았잖습니까”
흐리던 하늘은 어느덧 맑아지고 무지개가 떴다. 청명은 무지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몰라, 우리한테 시간은 많잖냐, 이번 여름은 술이나 마시자, 내년 여름은 바다에 가고 그렇게 살자”
“그래요”
마주 보고 웃는 두 정인의 얼굴은 마침내 찾아온 평화를 온몸으로 느끼는 듯 행복해 보였다.
수십, 수백의 행복을 되찾아주고 정작 찾아온 행복은 턱없이 작았지만 그들은 그걸로 만족했다.
너와 내가 살아있는 지금 그걸로 된 거다 말하지 않아도 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닫고 잔을 부딪혔다.











"아이고... 덥다아..."
"......"
"에구구 덥다... 더워..."
"......"
"아고고 덥네... 천하의 암존 줄줄 다 녹아 내리네..."
"......"
당보가 마룻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마루에 걸터앉은 청명의 눈썹이 콱 한데 모였다. 사천의 여름은 습하고 덥다. 아마도 당보가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사천은 그런 동네였다. 또 무슨 시위라도 하는 건지. 방에서 뒹굴거리며 행복한 한 때를 보내고 있다가 당보의 성화에 못 이겨 마루까지 끌려 나온 청명에게선 영 고운 말이 나가지는 않았다.
"이 자식,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엎드려 있던 몸을 옆으로 굴려 누운 당보가 말 없이 씨익 웃었다. 청명의 눈썹 하나가 쑥 올라갔다가 미간으로 모이고, 입이 작게 열렸다. 다만 무어라 말이 나오진 않았고 한숨만 삐져나왔을 뿐이다. 당보의 눈에 거꾸로 비친 청명이 엉덩이를 털며 벌떡 일어났다.
"... 그래. 어디든 가자. 앞장 서라."
"말 무르기 없기입니다?"
사지를 활짝 펼친 채 누워있다가도 몸을 일으키는 데에는 눈 깜빡이는 시간 정도면 충분했다. 아주 녹아서 바닥에 들러붙을 기세였던 당보는 순식간에 휘리릭 몸을 다시 뒤집고 두 발로 땅을 박차 바르게 섰다. 어딘지 신난 목소리가 팔랑팔랑 화살처럼 쏘아져 청명의 앞을 스쳤다.
"그럼 따라오쇼! 도사 형님은 모르는 곳을 내 알지요!"
펄럭이는 당보의 소매는 바로 대문으로 향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보는 문 앞에서 홱 꺾어서는 행랑채로 쏙 들어갔다. 어디까지 하나 보자, 정도의 감상이었던 청명은 비딱한 얼굴로 그 앞에서 기다렸다. 기다리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당보는 천 뭉치를 두 손 가득 들고 되돌아 나와, 성급하게 청명을 방으로 이끌었다. 요즘 들어, 아니지, 전쟁 이후 청명은 당보에게 조금 물러졌다. 전쟁 전과 비교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마 누군가 봤더라면 두 눈알을 빼고 씻어서 다시 넣고 싶은 기분이 들었겠지만, 다행히도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청명은 당보가 이끄는 대로 방으로 들어가 갈아입었다.
"이건 또 뭐냐?"
"우리가 그래도 이름값이 있는데 너무 사방팔방 누가 봐도 도사인 차림새나 누가 봐도 당가인 차림새를 하는 건 좀 너무 튀지 않겠소?"
부산스럽게 옷을 갈아입는 사이로 두런두런 대화가 이어졌다. 손은 부산스럽게 움직이지만 입도 쉴 새가 없다. 두 사람은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늘어놓아도 힘들이지 않고 대화가 이어진다.
'여기가 사천인데 네놈 얼굴 하나 모르는 이가 그렇게 많겠냐?''여기 웬 외팔이가 자기 얘기 하는 것 같소만~''너 임마 한 대 맞자.' 따지자면 도란도란 보다는 투닥투닥이 어울릴 것 같은 내용이 오가고, 무언가 걷어차는 소리와 함께 짧은 비명이 울렸다.
그 난리를 쳐서 당보가 청명을 데려간 곳은 노상 찻집이었다. 덥다는 것 치고는 호수와 같은 물가를 찾지 않아 이상하다 했더니 그늘을 여럿 만들어 둔 찻집에 온 것이다.
"너희 집에도 마실 건 한참 남지 않았냐 "
"그거랑 이거랑은 또 다르지요. 느낌! 느낌이 다르단 말입니다. 자자 앉아 보시오."
당보가 공손히 두 손을 모아 빼낸 의자를 가리켰다. 청명은 픽 웃고 당보가 빼 놓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간사한 얼굴을 만든 당보는 잠시 있으시오! 하고선 자리를 비웠다. 역시 허당이라니까, 하는 감상과 함께 청명은 주변을 가볍게 둘러 보았다.
오며가며 많이 본 풍경이다. 사천 사람들은 어디서든 차를 즐겼다. 당가로 향하는 수 많은 경로들 중 어떤 경로를 택하더라도 그 길에는 찻집이 있다. 지붕도 없이 탁자만 있는 작은 찻집도 있는가 하면, 지금 온 곳처럼 호숫가가 내려다보이는 목 좋은 곳에 세워져 퍽 비싸 보이는 찻집도 있었다. 청명은 심드렁한 얼굴로 턱을 괴고 앉아 반짝이는 물결을 눈에 담았다. 화산에서 늘 보던 것은 산이나 숲이나 그런 것들이었고, 당가의 마루에 앉으면 잘 다져진 흙이나 대나무 같은 것들을 보게 마련이니 조금 새로운 것도 사실이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눈만 깜박이고 있으면 아직 뜨끈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맞아 줄 법한 바람이 불었다.
"생각 해 보니... 내 도사 형님과 사천의 명물이라는 차를 마셔보지는 않은 것 같습디다? 아무래도 꽃차는 자주 마시는 게 아니니까요."
달각, 하는 소리에 뒤이어 당보가 말을 붙였다. 어느새 탁자에는 2인분의 다구가 놓여있었다.
"매번 장문사형이 대접하신 매화차는?"
"에이, 그건 그거고요. 사천의 꽃차를 대접해 드리고 싶었다, 이 말이죠."
차를 즐기지는 않지만, 차를 즐기는 사람에게서 거의 한 평생을 자라 어깨너머로 본 것이 많았다. 청명은 당보의 말에 이리저리 대꾸하면서도 뜨거운 물이 든 주전자를 쥐어들었다.
"꽃차라면 내가 너 보단 더 잘 알지."
"호오 어디 한 번 대화산파의 태상장로님의 숨겨진 실력을 좀 보실까요."
청명이 피식 웃고는 자사호를 한 손으로 잡고 어깨높이로 들어 올렸다. 찻물이 조르륵 찻잔으로 떨어지는데 잔 밖으로 튀질 않았다.
"상등품이구먼."
"아무렴 도사 형님을 제가 아무 데나 데리고 다닐 줄 아시고?"
"네가 해 다니는 거 보면 그럴 만도 하지?"
청명이 키득키득 웃으며 술수를 부렸다. 내공을 활용해 물을 덥히고 허공섭물을 응용해 떨어지는 물줄기로 회오리를 만든 것이다. 맞은편에 앉은 당보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아이고 아주 동네방네 검존 납셨다 소문을 다 내십쇼."
"이미 다 알 사실을 굳이 숨길 필요가 있냐?"
청명이 이번엔 자사호를 들어 묘기를 부렸다. 그래, 일종의 기예였다. 가볍게 들어 올려 자연스럽게 기울이고 찻물을 따르기까지 눈 한번 깜짝할 정도의 시간만이 흘렀다. 어느 새 앞에 놓인 잔이 찬 것을 본 당보가 '허 참, 제가 형님이 따라주신 잔도 받아봅니다?' 하고 혀를 내둘렀다.
"이것도 같이 먹어보시렵니까."
청명이 이건 또 뭐냐, 하고 있으니 당보가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편다. 무슨 손장난을 그렇게 하나 했더니 해바라기 씨를 한가득 까 놨다. '도사 형님은 모르시는 흥취라는 게지요!' 당보는 그 길로 입을 잘못 털어댄 죄로 뒤통수가 박살 날 뻔했다. 좋은 일을 하고서도 아주 입으로 매를 버는 놈이었다.
"뭐어... 그러니까... ... 덥다더니?"
무슨 맛으로 먹는 거냐, 굳이 말하지 않고 속으로 웅얼거리기만 하는 건 끊임없는 교육과 기나긴 시간이 이루어 낸 쾌거다. 그러면서도 일단 까 놓은 씨앗들을 왕창 입으로 가져가는 게 또 그다웠다.
"어허 시원하다아아아."
당보가 보란 듯이 찻잔을 들어 호로록 들이켰다. 눈까지 감아 시선을 피하는 걸 보고선 에휴 됐다, 하고 피식 웃은 청명이 턱을 괴고 앉아 호쾌하게 찻물을 넘겼다. 이어 탕! 하고 소리 나게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크으, 하는 소리까지 낸 청명이 품에서 길쭉한 것을 꺼냈다. 어울리지 않는 능숙한 손짓으로 떨치면 손에 쥔 것이 촤르륵 펼쳐진다.
난데없는 쥘부채, 청명과는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품목이었다. 청명이 자신에게 부채를 부쳐준다고? 예전의 제가 들었다면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그 정신 나간 대가리를 골백번 박살 내 놨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보는 눈썹 끝을 조금 내렸다. 이제 당보는 청명이 품에서 우아한 그림이 그려진 부채를 꺼내도 놀라지 않는다. 청명은 한 손으로 멋드러지게 부채를 펼치는 것이 익숙해졌다. 그렇게나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이다.
당보는 눈을 감았다. 이어지려는 생각의 고리를 끊는다. 눈을 떴다. 나긋하게 움직이는 청명의 손을 낚아채 부채를 세운다. 그저 면피용으로 세운 부채 뒤에서 빠르게 입술을 맞붙인다.
"...야!"
한 숨 늦게,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야 청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열양지기를 찻물 덥히는 데에나 쓰는 천하제일인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도 매번 둥그런 눈으로 놀라고, 바로 밀쳐내지도 않는다. 깜빡 잊었다는 듯이 한 박자 후에 터지는 사자후는 이제 당보에게는 오히려 두 사람만의 놀이처럼 느껴졌다.
"이크, 아니 늘 그렇지만 너무 오늘 아리따우시길래요."
당보는 조금 굼뜬 몸으로 피하는 시늉을 한다. 시늉만으로도 괜찮았다. 아주 예전의 어느 날 처럼 정수리에 꽂히는 것은 없다. 청명이 저도 모르게 몸에 익은 습관으로 주먹을 쥐어들었지만 그 뿐이다. 당보는 혀를 살짝 빼 물고 씨익 웃었다. 청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물론, 괜찮다고 해서 그 화산의 미친 개 서안의 망나니가 태어나면서부터 본디 타고난 인내심의 길이까지 길어지는 것은 아니니 여기까지 해야만 한다. 당보는 다급히 눈을 접어 웃었다. 부총관이 자주 써먹었던 생존수단을 최근 베껴 둔 터였다.
"아니 근데 저도 나름 때와 장소를 가리거든요, 도사 형님. 지금 사람들 죄다 다른데 정신 팔려서 이쪽은 보고 있지도 않다고요."
"왜."
당보가 턱짓으로 찻집 안을 가리켰다.
찻집은 ㅁ 모양으로 이루어진 가옥을 개조하여 만들어진 곳이었다. 당보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탁 트인 마당의 탁자에 앉아 노상 찻집인 줄로만 알았지만, 따지고 보면 찻집의 한 부분이 노상 찻집인 것이다. 찻집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질좋은 비단을 쓰는 이들은 마당의 탁자는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과연 처음 자리에 앉을 때만 해도 주변에 온통 바글바글하던 양민들이 죄다 몰려가 찻집 안으로 향하는 통로 근처에 서 있었다. 간혹 따라가지 않고 자리에 그대로 앉은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모든 신경이 한 곳으로 쏠려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가 있대?"
입으로는 당보에게 물어보면서도 청명은 청력과 안력을 돋워 찻집으로 통하는 길을 들여다보았다. 청명은 누군가에게 일을 시키고 앉아서 결과를 기다리는 유형의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뭐든 빠르게 직접 움직여야 성이 풀리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당보가 무어라 대답하기야 했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는 귓등을 스칠 뿐이었다.
"이 시간대에는 여기서 작은 공연을 한답디다. 불을 잘 다루는 자가 있어, 이것저것 보여주는데 아주 화려하다고 하더라고요. 저희도 가서 볼까요?"
보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이미 안다는 듯 유유자적한 당보가 은근슬쩍 뻐겼다. 그는 선심이라도 쓰는 투로 가슴을 쭉 내민 채 마무리를 지었다. 당가의 것은 아니었지만 사천의 명물은 곧 당가의 것이 아니겠는가? 당보는 자랑스러운 사천의 것을 아끼는 도사 형님에게 보여주는 것을 즐겼다. 말본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청명의 반응은 물리적인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청명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 남기는 칭찬이 그렇게 달 수가 없었다.
"..."
"... 도사 형님?"
하지만 당연하게 떨어져야 했을 것들은 떨어지지 않고 예상치 못한 침묵만 부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당보는 순간 몸을 굳혔다. 물방울이 한 둘 떨어졌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간의 길고 짧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어두운 밤에 청명이 안 하던 짓을 하고 진지해지면 반사적으로 심장부터 덜컥 내려앉는 것 뿐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두 사람에게 그것은 어떤 것의 시작을 알리는 징조였으니.
"당보."
"예?"
청명이 이름으로 당보를 불러들였다.
"극을 하는데..."
난데없이 웬 극? 사천은 당가의 앞마당이다. 사천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당가가 모를 리 없고, 특히나 이 찻집처럼 꽤 유명한 지역 명물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아침나절부터 비비적거리며 있는대로 한량스럽게 시간을 보냈지만, 당보는 이틀 전부터 가주를 있는대로 볶아 이 찻집에 대한 온갖 것들을 보고 받았다. 젓가락 개수까지 조사해온 걸 봤는데 이게 없을 리 없다.
"야. 가보자."
팔꿈치를 잡고 생각에 빠진 당보의 옆구리를 청명이 찔렀다.
"예?"
청명은 대꾸하지 않고 그저 벌떡 일어나 당보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안 그러던 사람이 하는 행동에는 박력이 있다. 그 앞에 무엇이 있는지 하나도 알지 못한 채 당보는 그저 무력하게 끌려갔다. 맞잡은 커다란 손이 따뜻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찻집 중앙에는 이야기꾼이 한 사람 있었다. 필요할 때마다 다른 사람인 것처럼 감쪽같이 소리를 내서 마치 여러 명이 연극을 하는 것 같았다.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듣고 있는 양민들이 눈을 반짝이는 것을 보면 꽤 되었던 것이 분명했다.
"이 못된 마교 놈아! 이 매화검존이 두렵지 않느냐! 내가 너를 처단할 것이다!!"
주변을 살피던 당보의 귀에 과할 정도로 크고 울리는 목소리가 쑤셔박혔다. 과장된 몸짓으로 보이지 않는 칼날을 뽑는 흉내를 낸 이야기꾼은 한 손에 붉은 꽃 문양을 그린 나무조각을 들고 있었다. 지금은 그가 매화검존인 것이었다. 방심하고 있던 당보는 순간 터지듯 웃어버리고 말았다.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손을 휘휘 젓는 이야기꾼은 몸집도 작고 깡마른 편이었다. 그가 매화검존이라니!
그 다음 순간 이성이 돌아온 당보가 아차, 하고 옆에 선 사람의 눈치를 봤지만, 양민에게는 뭐라 하기 어려운지 청명도 그저 미간만 모은 채 입술만 쭉 내밀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목만 쭉 뺀 것이 거북이 같았다. 있는대로 찌그러진 얼굴을 보며 당보는 또 다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꽤 유명한 이야기꾼일 것은 분명했다. 그는 꽤 신묘한 솜씨를 가졌다. 줄이자면 한 두 줄로 줄일 수 있을 법한 내용으로도 그는 한참을 떠들었으며, 긴 이야기에 사람들의 집중력이 흩어지는 낌새가 보이면 갑작스러운 효과음을 넣거나 우스갯소리를 하며 관객을 불러서 순식간에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어찌나 말을 잘 하던지 당보도 청명도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들이 겪은 정마대전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는데도.
"에잇! 이렇게 단-칼에 마교 대장을 처치하고! 쓰러진 암존을 구하셨죠!!"
진지한 얼굴로 목소리를 키워 외치는 소리는 얼핏 영웅적으로까지 들렸다. 양민들의 감탄사가 쏟아지면 이야기꾼은 손에 막대기를 들고 흔들며 '그렇다. 그들은 영웅이었다. 위대했으며, 적을 이겼다.' 고 눈으로 쐐기를 박았다. 당보에게도 청명에게도 전쟁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정마대전을, 혹은 그 시절과 연관된 것을 떠올리기만 해도 코에 비릿한 냄새가 스쳤고, 간혹 눈꺼풀 뒤로 수라도를 방불케하던 그때가 떠올랐다. 누군가의 꿈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당보는 부러 피식 웃으며 청명에게 말을 걸었다.
"형님 솔직히 말해 보십쇼. 혹시 화산에서 저자를 매수라도 했습니까? 언제 형님이 쓰러진 저를 구하셨소? 쓰러진 형님 구하기는 제 담당 아니었습니까?"
"... ... 있어."
잠깐 듣지 못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지 청명은 한발 늦게 대답했다. 원래도 말이 짧은 편이지만 유난히 짧은 대답이었다. 낮게 잠긴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비상이었다.
뭔가 안 좋은 곳을 찔렀다. 당보는 자신이 굉장한 오답을 고르고 말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선 채로 눈을 굴리며 머리를 폭발적으로 돌리고 나서야 당보는 뒤늦게 그것이 언제인지 깨달았다.
언제나 앞서는 것은 청명이고, 주교의 검을 받아내는 것도 청명이니 늘 전투에서 크게 다치는 것은 청명이었다. 그 길고 힘든 시간 속에서도 당보가 먼저 쓰러진 것을 꼽자면 다섯 손가락 안에서 끝낼 수 있다. 한 번은 청명이 없을 때, 한 번은 대산혈투의 직전이다. 그 때즈음엔 대부분의 전투에 청명과 함께 나갔으니 쓰러진 당보를 수거한 것은 청명이었을 것이다. 큰 부상으로 의식이 꽤 오래 없었고, 충격으로 기억도 흐린 부분이 많은 탓에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아하 제가 깜박 했습니다~! 도사 형님도 도움이 될 때가 있었죠!' 같은 말이나 '아이 참 저도 다 됐다 봅니다. 이게 기억이 안 나다니...' 같은 말이 순간 당보의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아무리 청명이 돌산에 살다 심장도 돌이 되어버린 망할 말코라고 하더라도 그에게 할 말 못 할 말을 가려야 할 때가 있다. 청명은 종종 당보는 짐작할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거나 갑자기 짜증내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당보는 이 말코가 어느 지점에서 기분이 저조해졌는지 헤아렸다. 분명 마음을 통한 게 맞는 것 같은데 어찌 이렇게도 어려울까.
당보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갈팡질팡 하는 사이 이야기는 절정을 향해 달렸다. 이야기 속에서 암존은 매화검존과 함께 십만대산을 올랐다. 산꼭대기의 천마는 저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용맹한 매화검존이 네 이놈 소리를 지르며 칼을 휘둘렀더니, 그놈의 목이 뎅겅 하고 떨어졌다. 겁 먹은 듯 긴장한 듯한 목소리를 꾸미던 이야기꾼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다가 마침내 끝을 고하면서는 거의 비명을 질렀다. 조마조마한 얼굴로 기다리던 양민들이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자."
"예? 예!"
청명은 내내 말 없이 듣고 있다가 천마의 목이 떨어지자 몸을 돌렸다. 어어 하면서도 당보는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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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보는 요즘 잠이 많아졌다. 원래도 아무데서나 픽픽 쓰러져서 잘 자는 축이었지만 더 빠르게 곯아떨어졌고, 아침 느즈막히 일어났다. 당보가 잃어버린 것은 무위 뿐인 것이 아니었으니 온 당가의 사람들이 당보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가졌다. 심지어 지난 주에는 청명에게까지 말을 거는 이까지 나왔으니 말을 다 했지. 조심스럽게 말을 떼는 사내에게 청명은 최선을 다해서 보고 느낀 모든 것을 줄줄이 읊어주었다. 아마 요 몇 달 중 가장 많은 말을 한 날이었을 것이다.
청명은 더위에 못 이겨 자꾸만 늘어지던 한 낮의 당보와 편안한 얼굴로 깊이 잠든 당보를 번갈아 떠올렸다. 한서불침의 경지를 내려놓지 못한 청명은 당보를 보며 더위와 추위를 미루어 짐작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튼 해가 진 지 한참 지난 밤은 꽤 선선한 모양이었다. 청명은 늘 습관적으로 닫아둔 문에 생각이 뻗쳐 무심결에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귀신같이 당보가 무어라 웅얼거리며 팔을 뻗어왔다. 청명이 멀리 간 것을 꿈 너머에서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짜식, 덥다더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청명은 이부자리로 돌아가 다시 누웠다. 눈을 뜨지도 못한 채로 당보가 꾸물거리며 붙어왔다. 여전히 종종 쑤셔오는 왼팔에 당보의 온기가 닿았다. 이젠 없어진 것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허전함을 느낀 공간이 당보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어쩐지 오늘 꿈자리는 사납지 않을 것 같았다. 왼팔에 바짝 붙은 당보의 고른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천천히 몸이 나른해졌다.
그 밤의 꿈 속엔 그날 갔던 호숫가의 찻집이 나왔다. 그 곳에서 청명은 이름 모를 양민들이 떠드는 소리나 호수에서 부터 불어온 바람에 섞인 물냄새, 어쩐지 눈에 들어오는 긴 속눈썹 같은 것들을 차례대로 천천히 짚고는 새삼스럽다는 듯이 주절거렸다.
- 그러게, 잘 생기긴 했지?
그러면 마치 마음의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당보가 눈을 맞추고는 그러하냐, 하는듯이 가늘게 웃었다. 청명은 당보의 미소와 흐트러지는 긴 머리칼 같은 것들을 눈에 담으면서 저도 모르게 '좋구나.'하고 중얼거렸다.
평화로운 여름 밤이었다. 시계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어둠을 경계할 일 없이 그저 어둠 속에 빛나는 이의 미소를 그리기만 하면 되는.
